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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lekim
김샘플 Kim Sample
sample1332@gmail.com

Is this the “Couple Format?”

A powerful, pervading idealism often drives people in their late-teens or early twenties. Passion! Immortality! This heady cocktail delivers a delusion that the person you love is the one you must work with. Thus, the Couple Format becomes the ultimate public/private Gesamkunstwerk, a total theatre of reciprocities and supposed syntheses.🦷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자. 카드보드, 알루미늄 호일, 포장 테이프처럼 일상적인 재료들을 대충 꿰어 맞추고, 급진적 예술가, 작가, 철학자에게 헌정된 이미지, 텍스트, 기념물을 사제 공부방-겸-제단마냥 하나 가득 정신없이 늘어놓은 일시적인 전시물. 혹은, 망실된 대지미술의 한 모델과 시민권 운동의 슬로건 그리고/또는 당대의 전설적인 록 콘서트를 녹음한 소리를 병치하는 펑크 풍 설치. 혹은, 원래 상태가 좀 더 남아 있는 구역을 살펴보자면, 두 세계 대전 사이에 영국 켄트 주 해안에 세워졌으나 곧 시대에 뒤떨어진 군사 기술품이 되어 폐기된 거대한 청각 수신기를 다룬 짧은 영화적 명상. 스위스인 토마스 허쉬혼(1957-), 미국인 샘 듀란트(Sam Durant, 1961-), 영국여성 타시타 딘(Tacita Dean, 1965-)이 만든 이 작업들은 주제, 외양, 감흥에서 아주 다르지만, 그럼에도 공유하는 생각이 하나 있다. 예술적 실천이란 현대의 예술, 철학, 역사에 속하는 특정한 인물, 대상, 사건 들을 파고드는 특이한 탐색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예들은 몇 배나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다른 현업 작가들을 꼽자면, 스코틀랜드인 더글라스 고든 Douglas Gordon(1966-), 영국인 리암 길릭 Liam Gillick(1964-), 아일랜드인 제러드 번 Gerard Byrne(1969-), 캐나다인 스탠 더글라스 Stan Douglas(1960-), 프랑스인 피에르 위그 Pierre Huyghe(1962-)와 필립 파레노 Philippe Parreno(1964-), 미국인 마크 디온 Mark Dion(1961-)과 르네 그린 Renée Green(1959-)…으로 목록을 시작해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에서 국제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아카이브의 충동을 가리키는 것은 이 세 사람뿐이다. 이 일반적인 충동을 새로운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예술의 원천이 정치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 모두에서 확장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도 다양하게 작용했으며(가령, 알렉산더 로드첸코의 포토파일과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에는 더욱 다양하게 작용했는데, 특히 차용된 이미지와 수열적 포맷이 관용구(가령, 인디펜던트 그룹의 게시판 미학, 로버트 라우센버그로부터 리처드 프린스에 이르기까지 재현을 재매개한 작업, 그리고 개념미술, 제도 비판, 페미니즘 미술의 정보제공 구조)가 되면서 그랬다. 그런데도 제 나름의 독특한 성격을 가진 아카이브 충동이 다시 널리 퍼졌다 – 그 자체 고유한 경향으로 고려될 만큼 널리 퍼진 것인데, 이만큼까지는 환영할 일이다.[1]

우선 아카이브 미술가들은 주로 상실된 혹은 추방된 역사적 정보를 물리적으로 현존하게끔 만들고자 한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발견된 이미지, 오브제, 텍스트를 낱낱이 파고들며, 설치 형식을 선호하는데, 실제 작업도 그렇게 한다. (그들은 설치의 비위계적인 공간성을 자주 이용한다 – 동시대 미술에서는 오히려 드문 점이다.) 더글라스 고든 같은 몇몇 작가들은 ‘시간 레디메이드’에 끌린다. 이미지 프로젝션으로 샘플링한 시각적 서사에 끌린다는 말인데, 이는 알프레드 히치콕, 마틴 스콜세지 등이 만든 영화를 극단화시킨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2] 이런 원천들은 대중문화의 아카이브로부터 가져온 것이라 친숙해서 가독성을 보장하지만, 이 가독성은 차후에 교란 또는 방향전환(detourn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천들은 또한 아리송할 수도 있는데, 대안적 지식 혹은 대항-기억의 표시로 회수되는 탓이다. 이런 작업이 내가 여기서 주목하려는 초점이다.👥

때로 아카이브 샘플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복잡한 쟁점으로 만든 독창성과 작가성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의 〈영혼 없이 껍질뿐인 No Ghost Just a Shell〉(1999-2002) 같은 협업 프로젝트를 생각해보자. 어떤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가 망가 캐릭터 가운데 일부 단역을 판다고 내놓자, 위그와 파레노는 그 중 한 캐릭터-기호인 ‘안리(AnnLee)’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를 사서 이 상형문자를 다양한 작품에서 윤색했는데, 그러면서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같은 작업을 청했다. 여기서 이 프로젝트는 프로젝트들이 이어지는 “연쇄”, 즉 “구조가 생산하는 형식들이 다시 구조의 일부가 되는 역동적인 구조”로 변한다. 또한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 안에” – 하나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아카이브가 형성되는 가운데 – “존재하는 한 공동체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3] 프랑스 비평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는 이 같은 미술을 ‘포스트프로덕션’이라는 제하에 옹호했는데, 이는 흔히 그 미술을 구성하는 2차 조작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용어는 또한 디지털 정보 시대에 달라진 예술작품의 지위를 내비치기도 하는데, 이 시대는 산업생산과 대량소비에서 이루어지는 2차 조작을 추종한다고 한다.[4] 이 같은 새로운 시대가 그처럼 존재한다는 생각은 이데올로기적 가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는 흔히 가상세계의 레디메이드로, 즉 재가공되어 전송되는 수많은 데이터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고, 많은 예술가들이 ‘목록 작성’, ‘샘플 추출’, ‘공유’를 작업 방식으로 택하는 것도 분명하다.